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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와 철강이 만났다'' 융합 기술의 시너지를 이용해 산업 '구조'를 바꿔버린 한국

아메리카휘 2026. 1. 18. 11:46

반도체 폐수가 산업폐기물에서 자원으로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나오는 폐수 슬러지는 불소 성분을 포함하고 있어 처리 난도가 매우 높은 산업폐기물로 분류돼 왔습니다. 매립과 소각 모두 환경 규제가 강하고 비용 부담이 커,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폐기물 처리비도 함께 치솟는 구조가 굳어져 있었습니다.

이 슬러지는 그동안 ‘어쩔 수 없이 비용을 내고 버려야 하는 찌꺼기’로 취급됐습니다. 공정을 아무리 효율화해도 폐기물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기 때문에, 기업들은 환경 규제 강화와 함께 늘어나는 처리비를 일종의 구조적 고정비로 떠안아야 했습니다.

슬러지 속 CaF2에 주목한 철강사의 발상

 

전환의 출발점은 이 슬러지에 포함된 플루오린화칼슘, 즉 CaF2 성분에 대한 재해석이었습니다. 제철소 제강 공정에서는 쇳물 안의 황과 인 같은 불순물을 제거하고 슬래그의 유동성을 높이기 위해 형석, 다시 말해 CaF2를 플럭스 용도로 투입해 왔습니다. 문제는 이 형석을 전량 혹은 상당 부분 수입에 의존해 왔다는 점이었습니다.

국내 철강사들은 반도체 폐수 슬러지 안에 들어 있는 CaF2가 형석과 동일한 화학 성분이라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적절한 정제와 전처리 과정을 거치면, 기존에 수입해 쓰던 형석의 상당 부분을 이 슬러지에서 추출한 CaF2로 대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포착됐고, 여기서 반도체와 철강을 잇는 공동 기술 개발이 본격화됐습니다.

현대제철과 삼성전자가 만든 새로운 공정 연계

 

실제 사례로, 현대제철과 삼성전자는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수 슬러지를 제강 공정의 부원료로 재활용하는 기술을 함께 개발했습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정에서 나오는 슬러지를 특정 규격에 맞게 처리한 뒤, 현대제철의 제강 공정에 투입해 형석을 대신하는 플럭스로 활용하는 구조입니다.

이 시스템이 작동하면 반도체 공장에서 나오는 폐기물은 ‘버려야 할 비용 항목’이 아니라 ‘철강 공정에 투입되는 자원’으로 전환됩니다. 동시에 제철소 입장에서는 국제 가격과 특정 국가 의존도에 휘둘리던 형석 수입 물량을 줄일 수 있고, 원료 조달 리스크도 완화할 수 있습니다.

ESG 부담 줄인 반도체, 원가·안보를 챙긴 철강

 

이 융합 모델이 갖는 의미는 각각의 산업 관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반도체 기업은 폐기물 처리 비용을 줄일 뿐만 아니라, 폐수·슬러지 처리 과정에서 제기되던 환경·ESG 리스크를 완화할 수 있습니다. 규제가 강화될수록 불리해지는 구조에서, 슬러지를 자원으로 순환시키는 시스템을 갖추면 오히려 ESG 평가에서 가점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됩니다.

철강 산업은 수입 형석 의존도를 낮추면서 원재료 비용과 공급망 리스크를 동시에 줄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형석처럼 특정 국가에 공급망이 집중된 원료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은, 단순한 원가 절감 차원을 넘어 지정학적 변수에 대한 방어 수단이자 산업안보 전략의 일부로도 해석됩니다.

산업 간 자원 순환이 만든 구조 변화

 

이 사례가 상징적인 이유는 특정 기업의 기술 우열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업 생태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조업 경쟁력은 산업별 기술력, 설비 투자, 인력 역량 등 ‘각자도생’ 방식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번 모델은 반도체와 철강이라는 한국의 대표 산업 두 축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공급망과 환경 규제, 원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팀플레이를 구현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한 산업의 폐기물이 다른 산업의 원료가 되는 구조를 확대하면, 국가 차원에서 자원 순환 효율과 환경 부담, 수입 의존도를 동시에 관리하는 새로운 경쟁 체계가 형성됩니다. 이는 개별 기업의 기술 성과를 넘어, ‘어떤 나라가 더 정교한 산업 간 연계 시스템을 구축했는가’가 경쟁력의 기준이 되는 단계로 한 걸음 나아갔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한국 제조업이 향하는 시스템 경쟁의 방향

 

반도체와 철강의 융합 사례는 한국이 단순히 공정 미세화나 설비 증설 같은 전통적인 투자 경쟁에서 벗어나, 산업 간 자원 순환 구조로 승부를 보려는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반도체 폐기물을 줄이려는 노력이 철강의 원가 절감과 원료 안보로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ESG와 공급망 안정성까지 함께 개선되는 구조는 다른 나라가 단기간에 모방하기 쉽지 않은 시스템 경쟁 요소입니다.

앞으로 이 모델이 정착되고 다른 공정·산업으로 확산된다면,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개별 기업의 기술 수준을 넘어 ‘산업 간 구조 설계 능력’으로 평가받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반도체와 철강이 만나 폐기물을 자원으로 바꿔낸 이번 시도는, 한국이 왜 융합 기술을 통해 산업 구조 자체를 다시 짜는 나라로 주목받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