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미엄 전략이 흔들린 한국 가전
LG전자는 지난해 4분기 1천억 원이 넘는 영업적자를 기록하며 한국 가전업계 전반에 경고등을 켜게 했습니다. 여기에 삼성전자 역시 반도체를 제외한 TV와 생활가전 부문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반복하며, 한국을 대표해 온 전통 가전의 수익 구조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진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일시적인 경기 둔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북미와 유럽 같은 선진국 시장에서는 대형 TV와 냉장고, 세탁기 등 핵심 제품들이 이미 보급률 상한선에 근접하면서 교체 수요만 남은 상황이고, 이마저도 소비 심리 위축과 함께 더욱 길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국의 중저가 공세와 가격 구조의 붕괴
한국 기업이 선택했던 프리미엄 중심 전략은 일정 시점까지 유효했지만, 최근 들어 그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기술 격차를 앞세워 고급형 제품으로 가격 프리미엄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중국 업체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갖춘 중저가 제품으로 글로벌 시장에 대규모 물량 공세를 펼치면서 가격 경쟁의 판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LG와 삼성 같은 기업들은 고급형 라인업을 유지하기 위해 연구개발과 마케팅에 더 많은 비용을 투입해야 했지만, 판매량이 그만큼 따라오지 못하면서 수익성은 오히려 악화되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미 수출 제품에 적용된 관세 부담이 원가에 그대로 반영되면서, 프리미엄 전략이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도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수출 둔화 속에서도 가전을 유지하는 전략적 계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LG가 가전을 포기하지 않는 데에는 글로벌 수출 감소와 적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전략적 이유가 깔려 있습니다. 냉장고와 세탁기, TV 등 전통 가전은 매출과 영업이익의 출렁임이 크지만, 여전히 브랜드 인지도와 소비자 접점 측면에서 기업 전체의 간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 세계 가정에 설치된 수많은 LG 가전 제품은 단순한 하드웨어를 넘어, 향후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구독 모델을 결합할 수 있는 기반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미 집 안의 전력 소비와 데이터 흐름을 관리하는 허브로서 가전의 위상이 커지고 있는 만큼, 이 시장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것은 장기적으로 회사의 전략적 옵션을 스스로 줄이는 선택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AI 가전과 연결 생태계로의 진화
LG가 최근 몇 년간 집중적으로 밀고 있는 것이 바로 인공지능을 접목한 생활가전입니다. 세탁 코스와 냉장고 온도를 스스로 조정하고, 에너지 사용량을 최적화하며, 사용자의 생활 패턴을 학습해 맞춤형 제안을 제공하는 기능을 전면에 내세우는 흐름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러한 AI 가전은 단순한 기능 추가 수준을 넘어, 집 안의 기기들끼리 연결되는 생태계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TV와 오븐, 세탁기와 공기청정기 같은 제품들이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데이터를 공유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서비스가 결합되면, 하드웨어 판매 이익보다 서비스와 데이터 비즈니스가 더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구도가 열리게 됩니다. LG가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가전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이처럼 미래 플랫폼 경쟁의 기반을 이미 집 안에 깔아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B2B와 인프라로 확장되는 숨은 교두보
LG는 가전을 단지 가정용 제품으로만 보지 않고, 산업용 공조와 에너지 관리, 데이터센터 냉각 같은 B2B 영역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두보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냉난방공조 시스템과 고효율 모터, 열 관리 기술 등은 본질적으로 에어컨과 냉장고 등 전통 가전에서 축적한 기술 자산과 맞닿아 있습니다.
데이터센터 냉각처럼 고성능 IT 인프라에서 요구되는 온도 제어와 에너지 효율 최적화는, 가전 사업과 분리된 전혀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열 교환, 압축기, 제어 알고리즘 등 핵심 기술이 상당 부분 겹칩니다. LG 입장에서는 가전 사업을 통해 확보한 기술과 공급망, 인력을 기반으로 B2B 인프라 시장까지 함께 공략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고, 이 구조 속에서 가전은 더 이상 단순 소비재가 아니라 미래 산업 포트폴리오의 루트에 가깝습니다.

구조적 위기 속에서 드러난 LG의 선택
결국 LG전자가 세계적인 수출 위기와 구조적 수익성 악화 국면에서도 가전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이 사업이 단기 실적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장기 전략의 핵심 축이기 때문입니다. 프리미엄 TV와 생활가전은 여전히 브랜드와 기술력을 보여주는 전면 무대이고, AI와 연결 서비스를 결합한 스마트홈 플랫폼, 그리고 냉난방공조와 데이터센터 냉각으로 이어지는 B2B 사업은 모두 가전 기술을 공통된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한국 가전산업은 선진국 수요 둔화와 중국의 공세라는 이중 압박 속에서 전례 없는 변곡점을 지나고 있지만, LG는 가전을 버리는 대신 이를 고도화하고 확장 축으로 삼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적자와 수출 부진이라는 숫자만 보면 철수 논리가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플랫폼과 인프라로의 확장 가능성을 감안하면 LG가 가전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히려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